2004년 03월 24일
유비가 황제의 숙부라고?
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마음속으로 그리는 명군의 형상 유비
인재를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민심을 얻어 촉한의 기업을 일군 당대의 영웅호걸임에 틀림없는 유비
그런 그의 찜찜한 이력인 황숙의 진위여부를 한번 후벼보자
연의에 보면 유비가 조조의 주선으로 당시 황제였던 헌제를 알현하는 장면에서
헌제는 유비가 황실의 종친이라는 말을 듣자 종족세보를 가져다가 조사하게 한 다음,
황숙임을 공표 한다. 스크롤의 압박에 불구 하고 그 내용을 옮겨보자
["효경황제께서 십사왕자를 두셨사온데 일곱째 아들이 중산정왕 유승입니다. 승이 육성정후 유정을 낳고, 정이 패후 유앙을 낳고, 앙이 장후 유녹을 낳고, 녹이 기수후 유연을 낳고, 연이 흠향후 유영을 낳고, 영이 안국후 유건을 낳고, 건이 광릉후 유애를 낳고, 애가 교수후 유헌을 낳고, 헌이 조읍후 유서를 낳고, 서가 기양후 유의를 낳고, 의가 원택후 유필을 낳고, 필이 영천후 유달을 낳고, 달이 풍령후 유불의를 낳고, 불의가 제천후 유혜를 낳고, 혜가 동군범령 유웅을 낳고, 웅이 유홍을 낳았사온데 홍은 벼슬을 아니한 백두이옵니다. 유비는 유홍의 아들이올시다"
"그렇다면 나하고의 촌수를 따져보라"
황제는 다시 말씀을 내리신다
"유비는 바로 폐하의 아저씨뻘이 되십니다. 황숙이올시다"
"오오 그러냐 나의 황숙이냐!"
황제는 반갑고 기뻤다 유비를 따로 편전으로 불러 절하며 "아저씨"라고 불렀다.]
위 열거들을 보면 마치 어디선가 한번정도는 비슷한 열거를 봤다는 느낌들을 받을거라고 생각한다.
과연 위 내용은 믿을만 한것인가?
그러나 사서를 뒤져보면 신빙성이 없는 글이라걸 알수 있다.
그 어디에도 유비가 황제의 숙부라는 글은 찾아볼수 없고 유비의 선조중 중산정왕 유승, 승의 아들 유정, 유비의 아버지 유홍, 할아버지 유웅등 만 사서에 명기되 있을뿐이다.
그렇다면 왜 나관중은 끊어진 유비의 가계를 만들어서 황숙으로 둔갑 시켰을까?
삼국시대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구전 되어오던 삼국의 고사중에서 유비의 역할은 항상 중요한 위치에 서 있었다.
서민들은 한왕실의 전통을 계승하고 백성을 궁휼히 여겼던 유비를 이상적인 명군의 형상으로 그려왔다. 민간예술인들은 이러한 유비가 가계조차도 불분명하다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을것이고. 그래서 온갖방법을 동원해서 궁리끝에 중간에 모호해진 유비의 가계가 연결되어 왔을것이다.
유비를 우러러 존경하는 이러한 심리는 나관중에게 까지 이어져 왔고 마침내 끊어진 가계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나관중은 가계를 꾸며내면서 자체적인 모순뿐만 아니라 작명의 오류를 범했다. 작명의 오류는 굳이 여기서 후비지 않겠다.
자체 모순만 한번 봐보자
연의삼국지 원문에 보면 처음 시작 부분에 유비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부분을 볼수 있다.
[그의 족보를 따져보면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요, 한경제각하의 원손이었다. 유승의 아들 유정은 한무제때 탁현 육성정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훗날 조정의 규정에 따른 제후가 한고조 유방의 제사를 위해 황제에게 헌납하는 황금을 내지 않아 작위를 박탈당하고 그중 유씨네 한 가지가 이곳 탁현에 살게되었다]
분명 이글에서는 유정이 이미 작위를 잃은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 아들 유앙이 처음 열거한 족보에서 보듯 패후에 봉해질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당시 시대적 관점으로 봐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혹시 훗날 누군가 표를 올려 복권을 해주었다면 이는 분명 사서에 기록 되있을 것인데 찾아볼수 없다는 것도 이 글이 자체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잇다는 것을 의미하겟다.
다만 번역본에서 위의 글을 찾아보기 힘든것은 삼국지를 연구하는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이부분의 오류가 인정 되었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일부러 누락 시키는 경향이 있다.
헌제를 한번 봐보자
사서에 보면 황제였던 헌제는 경제의 14대 현손이고 유비는 19대 현손이 된다.
항렬로 따지면 헌제가 유비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비는 황숙이 될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예술적 허구일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오류나 허구가 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글을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냥 참고로 알고 있을뿐 맘속에 담아두지 말자.
그리고 또하나 재미있는 점은
1968년 훈련중이던 중국 병사가 우연히 중산정왕 유승부부의 무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무덤이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금루옥의' 라는 수의를 완벽하게 발굴한 것이다.
이 옥으로된 수의는 2천 조각의 옥 네 귀퉁이에 구멍을 내고 이를 황금실로 엮어 만든 것인데 이 옷 한벌을 공인 한사람이 만든다면 10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중산정왕 유승의 기사를 보면
그는 술을 좋아하고 색을 좋아해 아들이 120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의 방종함은 제후왕들을 죄어오는 이복동생 한무제의 의구심을 피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면도 있었을 것이다.
인재를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민심을 얻어 촉한의 기업을 일군 당대의 영웅호걸임에 틀림없는 유비
그런 그의 찜찜한 이력인 황숙의 진위여부를 한번 후벼보자
연의에 보면 유비가 조조의 주선으로 당시 황제였던 헌제를 알현하는 장면에서
헌제는 유비가 황실의 종친이라는 말을 듣자 종족세보를 가져다가 조사하게 한 다음,
황숙임을 공표 한다. 스크롤의 압박에 불구 하고 그 내용을 옮겨보자
["효경황제께서 십사왕자를 두셨사온데 일곱째 아들이 중산정왕 유승입니다. 승이 육성정후 유정을 낳고, 정이 패후 유앙을 낳고, 앙이 장후 유녹을 낳고, 녹이 기수후 유연을 낳고, 연이 흠향후 유영을 낳고, 영이 안국후 유건을 낳고, 건이 광릉후 유애를 낳고, 애가 교수후 유헌을 낳고, 헌이 조읍후 유서를 낳고, 서가 기양후 유의를 낳고, 의가 원택후 유필을 낳고, 필이 영천후 유달을 낳고, 달이 풍령후 유불의를 낳고, 불의가 제천후 유혜를 낳고, 혜가 동군범령 유웅을 낳고, 웅이 유홍을 낳았사온데 홍은 벼슬을 아니한 백두이옵니다. 유비는 유홍의 아들이올시다"
"그렇다면 나하고의 촌수를 따져보라"
황제는 다시 말씀을 내리신다
"유비는 바로 폐하의 아저씨뻘이 되십니다. 황숙이올시다"
"오오 그러냐 나의 황숙이냐!"
황제는 반갑고 기뻤다 유비를 따로 편전으로 불러 절하며 "아저씨"라고 불렀다.]
위 열거들을 보면 마치 어디선가 한번정도는 비슷한 열거를 봤다는 느낌들을 받을거라고 생각한다.
과연 위 내용은 믿을만 한것인가?
그러나 사서를 뒤져보면 신빙성이 없는 글이라걸 알수 있다.
그 어디에도 유비가 황제의 숙부라는 글은 찾아볼수 없고 유비의 선조중 중산정왕 유승, 승의 아들 유정, 유비의 아버지 유홍, 할아버지 유웅등 만 사서에 명기되 있을뿐이다.
그렇다면 왜 나관중은 끊어진 유비의 가계를 만들어서 황숙으로 둔갑 시켰을까?
삼국시대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구전 되어오던 삼국의 고사중에서 유비의 역할은 항상 중요한 위치에 서 있었다.
서민들은 한왕실의 전통을 계승하고 백성을 궁휼히 여겼던 유비를 이상적인 명군의 형상으로 그려왔다. 민간예술인들은 이러한 유비가 가계조차도 불분명하다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을것이고. 그래서 온갖방법을 동원해서 궁리끝에 중간에 모호해진 유비의 가계가 연결되어 왔을것이다.
유비를 우러러 존경하는 이러한 심리는 나관중에게 까지 이어져 왔고 마침내 끊어진 가계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나관중은 가계를 꾸며내면서 자체적인 모순뿐만 아니라 작명의 오류를 범했다. 작명의 오류는 굳이 여기서 후비지 않겠다.
자체 모순만 한번 봐보자
연의삼국지 원문에 보면 처음 시작 부분에 유비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부분을 볼수 있다.
[그의 족보를 따져보면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요, 한경제각하의 원손이었다. 유승의 아들 유정은 한무제때 탁현 육성정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훗날 조정의 규정에 따른 제후가 한고조 유방의 제사를 위해 황제에게 헌납하는 황금을 내지 않아 작위를 박탈당하고 그중 유씨네 한 가지가 이곳 탁현에 살게되었다]
분명 이글에서는 유정이 이미 작위를 잃은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 아들 유앙이 처음 열거한 족보에서 보듯 패후에 봉해질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당시 시대적 관점으로 봐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혹시 훗날 누군가 표를 올려 복권을 해주었다면 이는 분명 사서에 기록 되있을 것인데 찾아볼수 없다는 것도 이 글이 자체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잇다는 것을 의미하겟다.
다만 번역본에서 위의 글을 찾아보기 힘든것은 삼국지를 연구하는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이부분의 오류가 인정 되었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일부러 누락 시키는 경향이 있다.
헌제를 한번 봐보자
사서에 보면 황제였던 헌제는 경제의 14대 현손이고 유비는 19대 현손이 된다.
항렬로 따지면 헌제가 유비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비는 황숙이 될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예술적 허구일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오류나 허구가 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글을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냥 참고로 알고 있을뿐 맘속에 담아두지 말자.
그리고 또하나 재미있는 점은
1968년 훈련중이던 중국 병사가 우연히 중산정왕 유승부부의 무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무덤이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금루옥의' 라는 수의를 완벽하게 발굴한 것이다.
이 옥으로된 수의는 2천 조각의 옥 네 귀퉁이에 구멍을 내고 이를 황금실로 엮어 만든 것인데 이 옷 한벌을 공인 한사람이 만든다면 10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중산정왕 유승의 기사를 보면
그는 술을 좋아하고 색을 좋아해 아들이 120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의 방종함은 제후왕들을 죄어오는 이복동생 한무제의 의구심을 피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면도 있었을 것이다.
# by | 2004/03/24 15:40 | 영웅들 대륙에 뜨고 지냐? | 트랙백 | 덧글(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